2015년 5월 30일 토요일

포스팅을 중단합니다.

포스트의 질 저하로 인해 포스팅을 중단합니다.
더 나은 내용으로 다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성 소수자와 커밍아웃

※ 본 글은 성 소수자 집단 전체를 아우르려는 의도로 작성하였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커밍아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말하는 커밍아웃은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하는 사람)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나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는 벽장 속에서 나온다(come out of the closet)는 표현에서 왔다. 현재도 벽장 속에 있다고 하면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숨기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볼 때 커밍아웃은 하는 사람도, 그 대상도, 주변 사람도 긴장을 하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여전히 커밍아웃이 무서운 사건이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는 것도 있고 나중에 아웃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한 성 소수자는 커밍아웃을 할 때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한 유튜브 동영상에서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커밍아웃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많고 그 사람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커밍아웃한 대상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웃팅으로 인해 비슷한 사건을 겪을 수 있다.

아웃팅은 일부러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아, 걔 동성애자래."하는 말이나, "얘가 동성애자야."하는 말은 당연하게 아웃팅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말을 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는 자신이 아웃팅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혹시 여기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이 글을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말을 하고 싶다. 절대로 다른 사람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마라. 당신은 그저 신기해서 하는 말일지 몰라도 그 말이 그 성 소수자에게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외에도 커밍아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참고 문헌으로 대체한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차세기연)의 웹진 ≪물꼬기≫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라고 링크를 붙인다.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1부 http://equalchrist.blog.me/220228566358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2부 http://equalchrist.blog.me/220311519484

2015년 5월 9일 토요일

[사설]비성애(무성애)와 섹스리스

※주의: 본 글은 필자 개인만의 관점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이 칼럼을 읽은 다른 비성애자의 관점은 소개하지 않도록 하겠다. (필자는 어떤 무성애자든 소개할 칼럼을 보고 불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칼럼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혹시 모르니 주소도 직접 붙인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4823

우선 이 글에서만큼은 비성애라는 단어 대신 무성애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은 칼럼에 반박하기 위해 쓰는 글임 또한 밝힌다.

1. 무성애는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필자가 이전에 쓴 글을 참고하면 무성애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성적 끌림을 감정과 연결된 성욕으로 인식하고는 있으나 이것 또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페티시스트(fetishist)도 무성애자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극단화하긴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성적 끌림이라는 것이다.

2. 어떤 사람이 성욕저하증이라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DSM-V도 읽어 보았으나 그럼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논하기에 필자는 아직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의사들끼리 하기 바란다.

3. 내담자 J씨는 일반적인 무성애자의 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무성애자는 자신에 대해 "이젠"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굉장히 꺼린다. 첫째, 무성애라는 것을 고칠 수 있음을 시사할 수 있는 표현이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둘째, 대부분의 경우 성적 지향은 변동적이지 않다.

"이젠"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앞으로 변할 가능성을 포함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려져 있다시피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부하다시피) 동성애는 고칠 수 없다. 실제로 성적 지향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이질적인 경우이고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성애자들은 무성애에 대해 오해할만한 표현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현재 무성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성히 많은 오해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개념이다. 그래서 한 무성애자의 말이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걸 국가관의 개념에 대입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입해보자면 외국인을 대할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신경쓰며 조심하는 것과 흡사하다.

4. 내담자 J씨만의 사례를 가지고 무성애를 이해하기에는 무성애가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다.

실제로 내담자 J씨가 무성애자라 할지라도 세상에는 무성애자가 아주 많고 무성애라는 것이 정말 유효한 개념인지에 대한 논의도 학술적으로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유효한 개념이라고 결론일 날 것 같다.) 그러한 무성애를 한 사람의 경우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필자의 글도 논리적 오류로 점철되어 있기는 하다.)

5. 1983년의 연구에서 무성애자에 대해 한 조사는 정말 유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재도 무성애라는 개념을 알지 못해 자신을 무성애자로 정체화하지 못하는 무성애자가 다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성애라는 것이 (다른 문제를 동반했든 않았든) 지배적인 문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해 무성애자들의 단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연구한 것이 과연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심지어 무성애라는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게 1980년도이다.)

6.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서 성관계는 중요한 요소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많은 연구에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업로드할 글에서 포함하도록 하겠다.) 성적 욕구(sexual desire)와 애정은 별개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성관계가 과연 깊은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

7. 무성애자라고 해서 다 성기능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은 다시 무성애가 무엇인지로 회귀한다. 무성애는 감정적인 문제에 가까운 것이지 신체적인 문제로 인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소개한 칼럼이 성애규범적(sexual-normative) 관점에서 쓰인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유)성애자(allosexual)의 관점

어떤 블로그 포스트를 읽었다. 필자가 읽은 후 본 블로그에 방문하게 되는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어 링크를 붙인다. 필자가 들은 경험담은 아웃팅 문제 때문에 함부로 밝힐 수 없음을 밝힌다.

http://latherydeath.blog.me/220245007199

위 블로그 포스팅에서 언급한 대로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반응은 양극성을 지니는 면이 없잖아 있다.

1. 부러워한다.
딱히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다. 어차피 이 점에 대해서는 딱히 기분 나빠할 거리가 없다. 그저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이상한 방향으로 이해한다.[1]
독신주의자인 줄 아는 경우는 그나마 양호하다. 문제는 성폭력의 피해자인 줄 알거나 환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성애 혐오증(무성애 혐오증; Aphobia)[2]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짧은 글이지만 한 블로그 포스트를 소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이만 줄이겠다.


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기사 첫 번째

필자는 보통 한국어 웹에서는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검색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검색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네이버에서 "무성애"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다. 가장 최근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는 경향신문의 기사였다.[1]

기사를 읽은 감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불쾌"였다.

기사를 쓴 기자가 직접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비성애를 제4의 성이라 했다. 우선 비성애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가 아닌데 제4의 성이라 하니 매우 불쾌했다. 아니 이 점에 대해서라면 다른 성 소수자들도 불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목을 붙여야 했나 싶었다.

기사는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씨가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성애가 알려졌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잠시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허지웅씨 덕분에 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애자(allosexual)에게 비성애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허지웅씨가 사용한 단어는 "무성욕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비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무성욕"이란 표현 자체는 비성애에 대해 이해할 때 방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단어를 비성애와 동일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비슷한 오해가 많음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 블로그 포스팅은 성애와 성욕을 동일시하였다. [2] 이런 블로그는 차라리 유성애자 입장에서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확실함이 빤히 보여 괜찮다. 하지만 의외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언론이 그런 오해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반영하여 작성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3]

마지막으로 기사는 비성애가 치료되어야 하는 병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하필이면 "정신분석적 갈등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현재 정신분석적 문제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4] DSM-5에서 언급하는 성욕 관련 사항들과 비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점은 다시 성욕(sexual desire)과 성애가 다르다는 사실로 돌아간다. 필자는 기사를 읽으며 두 개념을 혼동하여 비성애를 무성욕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자면 필자가 위에 링크를 건 기사는 성욕과 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무성욕"과 "무성애"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고[5] 쓴 별 도움 안 되는 기사이다.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무관하다.

우선 이 글에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정보가 포함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을 선정성을 의도로 작성하지는 않았음 또한 함께 밝힌다.

이 글은 퀘스처너리를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필자는 아직 다른 성 소수자(queer: non-heterosexual,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어떻게 확립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확립할 때를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원하는 경우 필자가 이미 올라온 글 중 비성애에 대한 글[1]과 성적 매력[2]에 대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3]

먼저 참고하라고 권한 글에 의하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비성애라 한다. 여기서 성적 매력이란 어떤 사람[4]과 성적인 접촉을 하여 성생활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5] 본 글에서 필자는 이 상기시킨 정의를 비성애에 대하여 많이 하는 오해와 연결하려 한다.

비성애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전혀 상관이 없다.

비성애와 성행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오해가 존재한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자위를 하는 사람이 비성애자일 수 없다.
많은 비성애자들이 커밍 아웃(coming out) 할 때[6] 위와 같은 오해에 부딛히곤 한다. 심지어 아직 성적 지향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들[7]마저 이런 오해를 하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필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반응하고 싶다.

위 오해는 비성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위로 올라가 어떤 사람을 비성애자라고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기를 바란다. 아마도 성행위와 관련된 단어[8]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 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자에게도 조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그렇다는 것 자체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사설]왜?

본 글은 15세 미만에게 대체로 권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므로 15세 미만이 읽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개인적으로 19세 미만의 접근을 막고는 싶지만 사실 그 정도로 선정적인 이야기를 할 예정은 아니므로 참도록 하겠다. 또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 없이 약간 불쾌할 수 있는 내용이 섞여 있음을 미리 밝힌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은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설명이 모든 비성애자들에게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someone who does not experience sexual attraction"[1]이란 비성애자의 정의를 가장 간단히 번역한 것이다.

저번에 필자가 본 한 블로그 글에는 비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글이 있었다. 사실 필자는 그 글을 읽고 불쾌했다.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다. 부정적인 의도로 언급하였으므로 굳이 링크를 걸지는 않겠다.

몇 년 전 필자는 <아가씨를 부탁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어느 한 장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2] 왜 했는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키스를 한 것도 알겠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겉옷을 벗긴 것도 알겠는데 왜 다음 화의 시작은 침대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두 남녀 주인공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키스, 포옹 등이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사랑이 성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는 필자에게 "그건 이해하는 게 아냐. 당연히 이루어지는 거지."라고 하였지만 그것마저 필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필자는 먼저 언급한 블로그 글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일단 이 영상을 보십시오. 당신은 이 영상에서 그 두 사람이 왜 성관계를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도 성애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이런 게 있는 줄 아십시오." [3]

성애자나 비성애자나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지 비성애자는 많은 성애자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에 성애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성적 매력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성애자가 어떤 사람의 성적 매력이 어떤 부분인지 짚을 수 있는 것은 학습의 결과이다. 그들이 직접 성적 매력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점을 감안하여 "성적 매력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표현하였다.) 필자가 중학교 때 미취학 아동들이 친구에게 뽀뽀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랑 아주 흡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4월 4일 토요일

[사설]본 블로그에서 비성애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

"Asexuality"가 처음 제시된 언어는 영어이다. 영어에서 접두사 a-는 우리말에서 不, 無, 非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참고) 따라서 "무성애"란 단어 자체는 원어 asexuality를 잘 번역한 단어이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비성애"를 "무성애"보다 선호하므로 본 블로그에서는 "비성애"를 더 많이 사용한다. 사실 이유는 별 거 없으나 이것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단 Asexuality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이븐(AVEN, The 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에서는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참고) 여기서 말하는 성적 매력은 어떤 대상(실존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에 성적인 것이 결합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정리하면 비성애는 성관계(Sexual Intercourse)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을 말한다.

위 정의, 그러니까 필자가 다시 정리한 비성애의 정의(성관계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에서 핵심은 부족하다거나 결핍되었다거나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사랑이 성애 한 가지로만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애(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 모성애 내지는 부성애, 효(부모를 향한 자녀의 사랑) 등은 성애가 아니고 가족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같은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서 성애가 아니라고 해서, 다시 말해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없다"는 형용사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지만 "사랑이 없다"고 할 때 받는 어감은 썩 좋지 않다. 결국 부정적인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꼭 "부족하다"는 단어랑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물론 "부족"이란 단어는 비성애를 설명할 때 유효한 단어이다. (참고) 하지만 처음 비성애(무성애)를 접할 때 "없다"거나 "부족하다"고 한다면 받는 느낌이 부정적일 수 있고 비성애(무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많은 성애자들이 비성애에 대해서 알수록 비성애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필자는 비성애자임을 밝혔을 때 성인인 척 한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또 많은 경우 소위 중2병이나 허세를 부린다고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있어 보인다고 비성애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질 수도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오해를 더 키우고 싶지 않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 이유로 "무성애"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필자는 "무성애"란 단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주장하는 "아니다"는 표현은 과연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대답하면 아니다. "아니다"는 "다름" 혹은 "차이"를 의미로 내포할 수 있다. (참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차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그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아니하다; 아니다 + 하다)"고 하면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고 "싫어한다"는 느낌까지 함께 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경우에 "나는 네가 아니"라는 명제는 자명하다.

요약하면 어감 때문에 필자는 차라리 "비성애"란 표현을 "무성애" 대신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본 블로그에서는 그러한 판단을 따르고 있다.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독자들이 엉덩국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라는 만화를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링크) 이 만화를 접한 적은 없더라도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인 '존슨'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은 상태로 등장한다. (이 글의 모티브는 RigVeda Wiki에서 얻었다.)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란 무엇인가?

에이븐(AVEN; Asexuality Visibility & Education Network)에서는 성적 지향을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는 대상'에 따라 구분한다. 에이븐이 아닌 곳에서도 어떤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지가 성적 지향을 구체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한다.성적 지향은 킨제이(Alfred Kinsey, 흔히 알려져 있는 킨제이 보고서를 쓴 저자이다.)가 연구에서 피험자를 분류할 때 시작된 개념이라는 견해가 있다. (참고, 특별히 37면)

성적 지향은 어떤 매력을 꾸준히 느끼는 경우에 결정되는데 이때 영향을 주는 매력에는 성적 매력, 정서적 매력(emotional attraction), 로맨틱한 매력(romantic attraction; 필자는 이것을 느끼는 것을 연애 감정을 느낀다고 주로 표현한다.) 등이 포함된다. (참고)


성적 지향의 종류

다음은 전통적인 성적 지향이다. (참고)

이성애(heterosexuality) : 이성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
동성애(homosexuality) :동성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
양성애(bisexuality) : 이성과 동성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

다음은 새로이 발견된 성적 지향이다.
범성애(pansexuality) : 성별과 무관하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이 경우는 성 이분법을 탈피한 성적 지향으로도 분류된다.)
무성애(asexuality) :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경우

다음 성적 지향은 성 이분법에서 탈피했다고 할 수 있다. (남성, 여성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이성, 동성만으로 성별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남성애(androsexuality) : 남성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
여성애(gynosexuality) :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
안드로진성애(androgynosexuality) : 안드로진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 이 성적 지향은 AVEN wiki에서는 유효하게 다루나 실제 유효한 것인지 필자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2015년 3월 21일 토요일

근(近)비성애(근무성애; gray-asexual) 용어 제안

필자는 아주 확실하게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이다. 따라서 이 성적 지향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입장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Gray-asexuality

제시된 단어는 비성애자(무성애자)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다. 이는 한정된 조건(특정 인물, 특정 상황 등)에서만 느끼는 성애(sexuality)를 의미하는데 현재 인터넷에서는 적당한 번역이 없어 한국어로는 주로 "회색 무성애" 내지는 "그레이에이"(gray-a; gray-asexual 또는 gray-asexuality의 줄임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을 어떤 의미로 표현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일단 다음 그림을 보자.


제시된 그림은 비성애기(무성애기(旗); Asexuality Flag)이다. 가장 위의 검정색은 비성애(무성애)를, 회색은 반(半)성애(demisexuality)와 근(近)비성애(근무성애)를, 흰색은 유성애를, 보라색은 비성애(무성애) 집단(community)을 상징한다. (출처) 여기서 주목할 점은 흑색과 백색이 각각 비성애(무성애)와 유성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우에 대해 흑백 논리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듯 성적 지향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하거나,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경우는 반(半)성애였다. 또 나중 경우는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근비성애(근무성애)였다. 그들의 주장(필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므로 주장이라고 표현하였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겠다. 그들은 각자 사용할 단어를 찾았는데 그것은 먼저 언급된 demisexuality와 gray-asexuality(grey-asexuality)였다.

gray-asexual들이 왜 하필이면 asexuality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생각해보면 뻔하다. (아직 정확한 의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확인 후 글이 수정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들은 비성애자(무성애자)가 자신들과 더욱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회색임을 특정한 것은 검정색(비성애, 무성애)와 같지 않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 좋겠으나 필자는 검정색이 비성애(무성애)를 상징하는 색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그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성애(무성애)와 비슷하면서도 다름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비슷하다는 표현 그 자체였다. 그래서 비슷하다는 의미를 갖는 근(近) 자를 앞에 붙여보았다.

2015년 3월 14일 토요일

비성애(asexuality)에 대한 성경의 관점

한국인 중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지만 의외로 꽤 많을 것이고, 또 의외로 꽤 적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20% 이상의 한국인이 종교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특별히 본 글에서는 다수를 차지하는 종교인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전인 성경을 통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종교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아 볼 것이다.

긍정적인 관점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비성애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사실 이것 말고 딱히 할 만한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근거가 필요하므로 성경 몇 구절을 들도록 하겠다. (본 글에서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인용하고 인용 위치는 가톨릭 성경과 개신교 성경의 것을 병기한다.)

첫번째 관점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마태 19, 10-12; 마 19:10-12)[1][2]
어느날 "바리사이"(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이유만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 답으로 예수는 성경을 근거로 둘을 가를 수 없다고 답하고 그 후 제자들의 반응이 위 구절이다. 많은 비성애자들이 위 구절을 비성애에 대한 옹호 발언이라고 여긴다. 위 구절에서의 "고자"와 비성애는 꽤나 다르지만 "고자"가 '욕정'을 배제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통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구절 참고)

두번째 관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 혼자 사는 이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1코린 7, 7-8; 고전 7:7-8)[1][2]
가톨릭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에서는 독신의 은사라는 것을 아주 큰 은사로 생각한다.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바로 제시된 구절이다. 위 구절을 썼다고 알려진 사람은 사도 바오로(바울)이다. (1코린 1, 1; 고전 1:1) 실제로 바오로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위 구절의 앞부분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결혼을 권한다. 그 이유는 "불륜"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1코린 7, 2; 고전 7:2) 여기서 말하는 불륜은 부부가 아닌 사람들끼리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한다. 또 상호 간에 특별한 경우(신앙에 전념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관계를 거부하지 말라고 권한다. (1코린 7, 5; 고전 7:5) 하지만 위 구절에서는 다르다. 독신인 사람들에게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권한다. 대신 "욕정"에 불타고 있다면 혼인하라고 권한다. (1코린 7, 9; 고전 7:9) 이유는 위에서 기술한대로 "불륜"을 예방하기 위함일 것이다.

위 구절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성경에서 독신을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이븐(AVEN; 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같은 비성애자 커뮤니티에서 종교(특히 기독교)적 가치관을 이유로, 결혼을 거부하는 비성애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종교를 이유로 어떠한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지 이전에 성경을 읽지 않은 결과 일어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한 술 더 뜬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약혼녀에게 잘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열정까지 넘쳐 혼인해야 한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니, 그 두 사람은 혼인하십시오. 그러나 마음속으로 뜻을 단단히 굳히고 어떠한 강요도 없이 자기의 의지를 제어할 힘이 있어서 약혼녀를 그대로 두겠다고 마음속으로 작정하였다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약혼녀와 혼인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혼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1코린 7, 36-38; 고전 7:36-38)[1][2]
사실 36절의 경우 ("어떤 사람이"부터 "혼인하십시오"까지) 지금 필자가 기술하려는 내용을 기준으로 고려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 절을 포함한 것은 비성애나 성애(유성애; allosexuality)가 (특히 성애가)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담으로 빠져서 살짝 아쉽지만) 간혹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나 비성애자 중에 성애가 잘못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위해 첨부하였다.

부정적인 관점과 그에 대한 반론

다음 내용은 철저히 비성애자의 입장에서 쓰여 내용이 빈약할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필자는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

첫번째 관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창세 1, 27-28; 창 1:27-28)[1][2]
사람이 자녀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성 간 성관계이다. 또 비성애자에게서 실제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 태도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성관계를 혐오(sex-repulsed; 에이븐에서 실제로 유효한 표현이다.)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죄"라 표현한다.

비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녀를 얻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임 부부는 자녀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왜 "죄"를 지었느냐고 하지 않는다. 고의성이 없기 때문이다. 비성애자도 마찬가지이다. 비성애자는 비성애를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사랑과 성관계를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은 고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3]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창세 2, 20; 창 2:20)[1][2]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 24; 창 2:24)[1][2]
위 구절들은 이성애(heterosexuality)가 아닌 경우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을 잘 보여 준다. 결국 사람은 신의 섭리에 따라 남녀가 결혼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구절들은 사람은 사회적 동물임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 때가 있다. 이는 "협력자"란 표현 때문이 아니다. 이 구절들의 앞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신의 관점에서 썩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른 동물들은 혼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내용에서 신은 사람이 사회를 이루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예수는 신이다. 그 사실은 삼위일체 사상(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셋이면서도 하나라는 사상으로 여기서 성자는 예수를 의미한다.)에서 잘 드러난다. 제일 위로 돌아가 긍정적인 관점의 첫번째 관점에서 인용된 구절에서 예수는 혼인하지 않기를 권하기도 한다.


2015년 3월 4일 수요일

짧은 생각 :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

본 블로그에서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많이 쓰이는 성적 끌림(sexual attraction)이란 단어 대신에 성적 매력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필자는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1. 사전적 의미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전적 의미가 실제 생활에서의 의미와 같지 않은 사실 자체를 문제로 삼자는 것이 아니다.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과 연애 지향(romantic orientation)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유성애자들은 상호작용 과정에서 성적 매력 자체를 느끼는 것과 사랑을 느끼는 것을 쉽게 구분해내지 못한다. 성소수자야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니 관심을 갖고 자세히 구분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성다수자가 두 단어가 다르게 쓰임을 보고 그 상세한 정보까지 찾아내려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히려 지나치게 어렵다고 생각하고 거부감을 갖는 일이 없으면 다행일 것이다.

2. 성적 매력을 아는 것과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필자는 어떤 것을 소위 '섹시하다'고 일컫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왜 그것이 섹시한지 물어보면 답할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 섹시하다고 하는지 학습되어 섹시한 것을 아는 것이지 그것을 느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가 말하는 핵심 요소에 가깝다. (핵심 요소 그 자체는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에 다룰 일이 있을 것이다.)

3. 일반 언중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과 거리가 있다.

성소수자 관련 지식과 표현들은 대부분 수입된 것이다. 따라서 어느 표현을 쓰든 어색할 수 있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기본적으로 성에 대해 더 관대한 관점을 지닌 사회에서 관련 지식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꼭 성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식들은 대부분 더 관심을 갖는 지역에서 발전했다. 그러니 단어의 기원이 우리말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두 언어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영어와 우리말은 아주 다르다. 단어 형성 방식이나 문법 외에도 단어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다르다. 그런데 그 표현들을 무분별하게 아주 단순한 해석만 거쳐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대중의 언어와 괴리가 생기게 된다.) 이 점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정보 이해성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연애 지향(Romantic Orientation)

이성애(heterosexuality), 동성애(homosexuality), 양성애(bisexuality), 비성애(asexuality) 등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어떠한 지향성이 존재한다. 이를 우리는 연애 지향(Romantic Orientation)이라 한다.

연애 지향의 종류

성적 지향과 비교한 연애 지향
위 그림은 성적 지향과 간단히 비교한 연애 지향이다. 실제로 이러한 분류법이 크게 통용된다. (물론 범비연애 영역에 속하는 연애 지향도 있지만 본 글에서는 그러한 분류는 일단 제외하였다.) 기준은 이전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romantic attraction"이다. 편의를 위해 "romantic attraction"을 느끼는 것을 '연애 감정을 느끼고 연애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표현하도록 하겠다.

이성연애(이성낭만; heteroromanticism) : 이성인 대상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성을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말한다.
동성연애(동성낭만; homoromanticism) : 동성인 대상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동성을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말한다.
양성연애(양성낭만; biromanticism) : 양성 모두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양성 모두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말한다.
범성연애(범성낭만; panromanticism) : 성별과 상관 없이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말한다.
비연애(무낭만; aromanticism) : 그 누구에게도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고 그 누구도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핵심은 간단하다. "저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 즉, 상대를 현실에서의 연애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애 지향과 성적 지향의 관계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애 지향은 성적 지향과 무관하다. 따라서 아무개의 연애 지향과 성적 지향은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자는 특별히 사용하여 표현하는 단어가 없지만 후자는 혼합 지향(mixed orientation sexualtiy; varioriented sexuality; 직역은 아니지만 이 표현이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이라 부른다. (참고) 예를 들어 아무개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이지만 연애 지향은 이성연애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혼합 지향인 사람이다.

수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가 혼합 지향이다. 따라서 일일이 연애 지향과 성적 지향을 모두 밝힐 필요는 없고 대신 연애 지향만을 밝히게 된다. 예를 들어 한 비성애자가 자신을 남성이라 정의하는데 남성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남성을 연애 대상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동성연애자(homoromantic)라 표현할 것이다. 물론 혼합 지향인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가 반드시 자신을 혼합 지향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다.

2015년 2월 17일 화요일

[특집]비연애(무낭만; aromanticism)

본 글은 AAW(비연애 알리기 주간; Aromantic Spectrum Awareness Week) 특집 기사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 중에는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와 비연애자(aromantic)가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특별히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이번에는 비연애(무낭만; aromanticism)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비연애(무낭만)라 함은 "romantic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연애 지향(Romantic Orientation)을 일컫는다. "romantic attraction"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게 하는 매력을 말한다. (참고) 굳이 우리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자면 '어떠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 연애 지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다시 조금 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하면 '누구에게도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고 누구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연애 지향'이다.

비성애자(무성애자)라 해서 반드시 누군가에 대해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비성애자 중에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연애도 필요 없다는 사람이 있었다. (AVEN에서 이루어진 조사)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완전히 같게 볼 수 없었고 결국 비연애(무낭만)이라는 연애 지향을 표현하게 되었다. (참고)

더 자세한 정보를 바란다면 AVEN 포럼의 연애 지향 관련 게시판(영어)(http://www.asexuality.org/en/forum/90-romantic-and-aromantic-orientations/)을 참고하길 바란다. 혹시 한국어로 된 관련 내용을 찾고 싶다면 Rigvedawiki의 비연애자 항목에 들어가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위키위키이기에 항목의 정보를 맹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2015년 2월 15일 일요일

[특집]비연애(Aromanticism)를 아십니까?

이번 주에는 큰 명절인 설이 있다. 그리고 이번 주간은 비연애 알리기 주간이기도 하다.

필자는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번 주간이 비연애를 알리기 주간을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설을 모르느니 차라리 비연애 알리기 주간을 모르고 말겠지만 필자는 설을 알기에 비연애 알리기 주간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다. (농담 섞인 궤변이다. 그냥 무시해주길 바란다.)

2015년 2월 16일부터 22일까지는 비연애 알리기 주간(Aromantic Spectrum Awareness Week; AAW)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연애 영역의 연애 지향을 알리는 주간이다. 혹시 영어로라도 정확한 정보를 원한다면 여기에 들어가 보기를 원한다. 링크된 사이트에는 범 비연애 영역(Aromantic Spectrum)에 속하는 다양한 연애 지향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물론 이 다음에 업로드가 이루어질 글에도 설명할 것이다.

비연애(비낭만, 무낭만; Aromanticism)은 한 종류의 연애 지향이다. 특별히 연애(낭만; Romanticism, 예술 관련 용어가 아님)와 대립되는 개념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연애를 추구하지 않는 경향이다. 즉, 연애가 아닌 것이다.

위 그림(출처)은 연애 지향(Romantic Orientation)과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그림이 아닌가 싶다. 연애 지향이 언제나 성적 지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애자(유성애자; sexual)도 얼마든지 비연애자(무낭만자; aromantic)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범비연애 영역에 속하는 연애 지향은 다음과 같다

비연애(Aromantic) :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경우
반(半)연애(Demi-romantic) : 연애 감정을 느끼기 위해 특정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 경우
근(近)비연애(Gray-aromantic) : 연애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아주 한정되어 있는 경우

독자들은 필자가 이미 쓴 글, 범비성애 영역에 속하는 연애 지향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이 개념은 독자가 이미 범비성애 영역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 지식을 연애 지향으로 다시 적용하기만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직접 제작한 비연애 알리기 주간 포스터를 첨부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로 그림판으로 제작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그럼 행복한 설과 비연애 알리기 주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범비성애(범무성애) 영역(Asexual Spectrum)에 속하는 성적 지향

이 글에서는 현재 비성애(무성애) 집단에서 아무런 논란이 없는 성적 지향만을 다룬다.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

아무개에게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유성애에서의 어떠한 대상의 성적 매력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것을 성적인 요소와 연결시키지 않는 것이다. 반의어는 성애자, 유성애자.

반(半)성애(demisexual)

낭만적이든 아니든 정서적 교류가 이루어진 후에야 성적 매력(성적 끌림)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반성애자들은 연예인, 운동선수 등의 개인적으로 무관한 사람에게서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다.

근(近)비성애(근무성애; gray-asexual)

비성애(무성애)에 가까운 성적 지향이라는 의미로 이 용어 자체는 필자가 번역하였다. (이유에 대해서는 곧 다룰 것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회색 무성애라고 칭한다.이 단어는 한정된 조건에서만 성적 매력(성적 끌림)을 느끼는 경우를 일컫는다. 여기서 한정된 조건은 특정 대상, 특정 상황 등을 말한다.

2015년 2월 7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

사람과 Asexuality

2001년 한 사람이 AVEN이란 단체를 세웠다. 이 사건은 성적 지향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AVEN은 Asexuality(비성애; 무성애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라는 단어를 무성생식이 아닌 사람의 성적 지향 표현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성애(무성애)란 무엇일까?

비성애(무성애)는 성애의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단어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는 성애가 무엇인지를 아는 편이 좋겠다. 우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성애의 사전적 의미는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이다. 하지만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의 표현이 사용된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성애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다시 비성애(무성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성애는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못한다고 표현을 하기도 한다.

비성애(무성애)라는 단어의 필요성

사실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 입장에서 쉽게 설명하면 "저는 당신들(성애자 내지는 유성애자)이 느끼는 사랑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어떠한 형태든) 관계에서 성행위(쉽게 말해 섹스)를 사랑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워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왜 당신들은 성행위를 관계에서 떼어내지 못하는 것입니까?"하며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사용한 표현은 필자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며 모든 비성애자들의 표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필자는 유성애자를 힐난하거나 무시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들의 사랑이 필자의 사랑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아주 단순하게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몇몇 발음의 차이를 구분하고 그렇지 않고와 아주 유사한 것이다. 무엇이 더 낫고 나쁘고의 개념이 아니다. 아무튼 위에서 표현한 대로 말을 할 수도 있다. 만약 필자의 대화 상대가 비성애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 개념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아주 간단히 "저는 비성애자입니다."하고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무성애자란 표현이 널리 퍼져 있음을 감안하면 무성애자라고 할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용어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