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차세기연)의 웹진 ≪물꼬기≫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라고 링크를 붙인다.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1부 http://equalchrist.blog.me/220228566358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2부 http://equalchrist.blog.me/220311519484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2015년 5월 9일 토요일
[사설]비성애(무성애)와 섹스리스
※주의: 본 글은 필자 개인만의 관점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이 칼럼을 읽은 다른 비성애자의 관점은 소개하지 않도록 하겠다. (필자는 어떤 무성애자든 소개할 칼럼을 보고 불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칼럼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혹시 모르니 주소도 직접 붙인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4823
우선 이 글에서만큼은 비성애라는 단어 대신 무성애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은 칼럼에 반박하기 위해 쓰는 글임 또한 밝힌다.
"이젠"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앞으로 변할 가능성을 포함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려져 있다시피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부하다시피) 동성애는 고칠 수 없다. 실제로 성적 지향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이질적인 경우이고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성애자들은 무성애에 대해 오해할만한 표현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현재 무성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성히 많은 오해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개념이다. 그래서 한 무성애자의 말이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걸 국가관의 개념에 대입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입해보자면 외국인을 대할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신경쓰며 조심하는 것과 흡사하다.
필자는 소개한 칼럼이 성애규범적(sexual-normative) 관점에서 쓰인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이 칼럼을 읽은 다른 비성애자의 관점은 소개하지 않도록 하겠다. (필자는 어떤 무성애자든 소개할 칼럼을 보고 불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칼럼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혹시 모르니 주소도 직접 붙인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4823
우선 이 글에서만큼은 비성애라는 단어 대신 무성애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은 칼럼에 반박하기 위해 쓰는 글임 또한 밝힌다.
1. 무성애는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필자가 이전에 쓴 글을 참고하면 무성애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성적 끌림을 감정과 연결된 성욕으로 인식하고는 있으나 이것 또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페티시스트(fetishist)도 무성애자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극단화하긴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성적 끌림이라는 것이다.2. 어떤 사람이 성욕저하증이라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DSM-V도 읽어 보았으나 그럼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논하기에 필자는 아직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의사들끼리 하기 바란다.3. 내담자 J씨는 일반적인 무성애자의 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무성애자는 자신에 대해 "이젠"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굉장히 꺼린다. 첫째, 무성애라는 것을 고칠 수 있음을 시사할 수 있는 표현이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둘째, 대부분의 경우 성적 지향은 변동적이지 않다."이젠"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앞으로 변할 가능성을 포함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려져 있다시피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부하다시피) 동성애는 고칠 수 없다. 실제로 성적 지향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이질적인 경우이고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성애자들은 무성애에 대해 오해할만한 표현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현재 무성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성히 많은 오해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개념이다. 그래서 한 무성애자의 말이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걸 국가관의 개념에 대입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입해보자면 외국인을 대할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신경쓰며 조심하는 것과 흡사하다.
4. 내담자 J씨만의 사례를 가지고 무성애를 이해하기에는 무성애가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다.
실제로 내담자 J씨가 무성애자라 할지라도 세상에는 무성애자가 아주 많고 무성애라는 것이 정말 유효한 개념인지에 대한 논의도 학술적으로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유효한 개념이라고 결론일 날 것 같다.) 그러한 무성애를 한 사람의 경우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필자의 글도 논리적 오류로 점철되어 있기는 하다.)5. 1983년의 연구에서 무성애자에 대해 한 조사는 정말 유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재도 무성애라는 개념을 알지 못해 자신을 무성애자로 정체화하지 못하는 무성애자가 다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성애라는 것이 (다른 문제를 동반했든 않았든) 지배적인 문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해 무성애자들의 단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연구한 것이 과연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심지어 무성애라는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게 1980년도이다.)6.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서 성관계는 중요한 요소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많은 연구에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업로드할 글에서 포함하도록 하겠다.) 성적 욕구(sexual desire)와 애정은 별개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성관계가 과연 깊은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7. 무성애자라고 해서 다 성기능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은 다시 무성애가 무엇인지로 회귀한다. 무성애는 감정적인 문제에 가까운 것이지 신체적인 문제로 인한 것은 아니다.필자는 소개한 칼럼이 성애규범적(sexual-normative) 관점에서 쓰인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유)성애자(allosexual)의 관점
어떤 블로그 포스트를 읽었다. 필자가 읽은 후 본 블로그에 방문하게 되는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어 링크를 붙인다. 필자가 들은 경험담은 아웃팅 문제 때문에 함부로 밝힐 수 없음을 밝힌다.
http://latherydeath.blog.me/220245007199
위 블로그 포스팅에서 언급한 대로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반응은 양극성을 지니는 면이 없잖아 있다.
1. 부러워한다.
딱히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다. 어차피 이 점에 대해서는 딱히 기분 나빠할 거리가 없다. 그저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이상한 방향으로 이해한다.[1]
독신주의자인 줄 아는 경우는 그나마 양호하다. 문제는 성폭력의 피해자인 줄 알거나 환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성애 혐오증(무성애 혐오증; Aphobia)[2]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짧은 글이지만 한 블로그 포스트를 소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이만 줄이겠다.
http://latherydeath.blog.me/220245007199
위 블로그 포스팅에서 언급한 대로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반응은 양극성을 지니는 면이 없잖아 있다.
1. 부러워한다.
딱히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다. 어차피 이 점에 대해서는 딱히 기분 나빠할 거리가 없다. 그저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이상한 방향으로 이해한다.[1]
독신주의자인 줄 아는 경우는 그나마 양호하다. 문제는 성폭력의 피해자인 줄 알거나 환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성애 혐오증(무성애 혐오증; Aphobia)[2]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짧은 글이지만 한 블로그 포스트를 소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이만 줄이겠다.
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기사 첫 번째
필자는 보통 한국어 웹에서는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검색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검색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네이버에서 "무성애"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다. 가장 최근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는 경향신문의 기사였다.[1]
기사를 읽은 감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불쾌"였다.
기사를 쓴 기자가 직접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비성애를 제4의 성이라 했다. 우선 비성애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가 아닌데 제4의 성이라 하니 매우 불쾌했다. 아니 이 점에 대해서라면 다른 성 소수자들도 불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목을 붙여야 했나 싶었다.
기사는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씨가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성애가 알려졌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잠시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허지웅씨 덕분에 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애자(allosexual)에게 비성애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허지웅씨가 사용한 단어는 "무성욕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비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무성욕"이란 표현 자체는 비성애에 대해 이해할 때 방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단어를 비성애와 동일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비슷한 오해가 많음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 블로그 포스팅은 성애와 성욕을 동일시하였다. [2] 이런 블로그는 차라리 유성애자 입장에서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확실함이 빤히 보여 괜찮다. 하지만 의외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언론이 그런 오해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반영하여 작성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3]
마지막으로 기사는 비성애가 치료되어야 하는 병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하필이면 "정신분석적 갈등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현재 정신분석적 문제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4] DSM-5에서 언급하는 성욕 관련 사항들과 비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점은 다시 성욕(sexual desire)과 성애가 다르다는 사실로 돌아간다. 필자는 기사를 읽으며 두 개념을 혼동하여 비성애를 무성욕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자면 필자가 위에 링크를 건 기사는 성욕과 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무성욕"과 "무성애"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고[5] 쓴 별 도움 안 되는 기사이다.
기사를 읽은 감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불쾌"였다.
기사를 쓴 기자가 직접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비성애를 제4의 성이라 했다. 우선 비성애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가 아닌데 제4의 성이라 하니 매우 불쾌했다. 아니 이 점에 대해서라면 다른 성 소수자들도 불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목을 붙여야 했나 싶었다.
기사는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씨가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성애가 알려졌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잠시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허지웅씨 덕분에 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애자(allosexual)에게 비성애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허지웅씨가 사용한 단어는 "무성욕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비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무성욕"이란 표현 자체는 비성애에 대해 이해할 때 방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단어를 비성애와 동일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비슷한 오해가 많음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 블로그 포스팅은 성애와 성욕을 동일시하였다. [2] 이런 블로그는 차라리 유성애자 입장에서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확실함이 빤히 보여 괜찮다. 하지만 의외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언론이 그런 오해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반영하여 작성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3]
마지막으로 기사는 비성애가 치료되어야 하는 병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하필이면 "정신분석적 갈등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현재 정신분석적 문제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4] DSM-5에서 언급하는 성욕 관련 사항들과 비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점은 다시 성욕(sexual desire)과 성애가 다르다는 사실로 돌아간다. 필자는 기사를 읽으며 두 개념을 혼동하여 비성애를 무성욕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자면 필자가 위에 링크를 건 기사는 성욕과 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무성욕"과 "무성애"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고[5] 쓴 별 도움 안 되는 기사이다.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무관하다.
우선 이 글에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정보가 포함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을 선정성을 의도로 작성하지는 않았음 또한 함께 밝힌다.
이 글은 퀘스처너리를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필자는 아직 다른 성 소수자(queer: non-heterosexual,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어떻게 확립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확립할 때를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원하는 경우 필자가 이미 올라온 글 중 비성애에 대한 글[1]과 성적 매력[2]에 대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3]
먼저 참고하라고 권한 글에 의하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비성애라 한다. 여기서 성적 매력이란 어떤 사람[4]과 성적인 접촉을 하여 성생활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5] 본 글에서 필자는 이 상기시킨 정의를 비성애에 대하여 많이 하는 오해와 연결하려 한다.
위 오해는 비성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위로 올라가 어떤 사람을 비성애자라고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기를 바란다. 아마도 성행위와 관련된 단어[8]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 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자에게도 조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그렇다는 것 자체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은 퀘스처너리를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필자는 아직 다른 성 소수자(queer: non-heterosexual,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어떻게 확립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확립할 때를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원하는 경우 필자가 이미 올라온 글 중 비성애에 대한 글[1]과 성적 매력[2]에 대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3]
먼저 참고하라고 권한 글에 의하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비성애라 한다. 여기서 성적 매력이란 어떤 사람[4]과 성적인 접촉을 하여 성생활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5] 본 글에서 필자는 이 상기시킨 정의를 비성애에 대하여 많이 하는 오해와 연결하려 한다.
비성애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전혀 상관이 없다.
비성애와 성행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오해가 존재한다.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자위를 하는 사람이 비성애자일 수 없다.많은 비성애자들이 커밍 아웃(coming out) 할 때[6] 위와 같은 오해에 부딛히곤 한다. 심지어 아직 성적 지향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들[7]마저 이런 오해를 하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필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반응하고 싶다.
위 오해는 비성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위로 올라가 어떤 사람을 비성애자라고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기를 바란다. 아마도 성행위와 관련된 단어[8]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 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자에게도 조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그렇다는 것 자체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사설]왜?
본 글은 15세 미만에게 대체로 권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므로 15세 미만이 읽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개인적으로 19세 미만의 접근을 막고는 싶지만 사실 그 정도로 선정적인 이야기를 할 예정은 아니므로 참도록 하겠다. 또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 없이 약간 불쾌할 수 있는 내용이 섞여 있음을 미리 밝힌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은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설명이 모든 비성애자들에게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someone who does not experience sexual attraction"[1]이란 비성애자의 정의를 가장 간단히 번역한 것이다.
저번에 필자가 본 한 블로그 글에는 비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글이 있었다. 사실 필자는 그 글을 읽고 불쾌했다.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다. 부정적인 의도로 언급하였으므로 굳이 링크를 걸지는 않겠다.
몇 년 전 필자는 <아가씨를 부탁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어느 한 장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2] 왜 했는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키스를 한 것도 알겠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겉옷을 벗긴 것도 알겠는데 왜 다음 화의 시작은 침대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두 남녀 주인공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키스, 포옹 등이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사랑이 성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는 필자에게 "그건 이해하는 게 아냐. 당연히 이루어지는 거지."라고 하였지만 그것마저 필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필자는 먼저 언급한 블로그 글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일단 이 영상을 보십시오. 당신은 이 영상에서 그 두 사람이 왜 성관계를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도 성애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이런 게 있는 줄 아십시오." [3]
성애자나 비성애자나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지 비성애자는 많은 성애자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에 성애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성적 매력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성애자가 어떤 사람의 성적 매력이 어떤 부분인지 짚을 수 있는 것은 학습의 결과이다. 그들이 직접 성적 매력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점을 감안하여 "성적 매력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표현하였다.) 필자가 중학교 때 미취학 아동들이 친구에게 뽀뽀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랑 아주 흡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은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설명이 모든 비성애자들에게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someone who does not experience sexual attraction"[1]이란 비성애자의 정의를 가장 간단히 번역한 것이다.
저번에 필자가 본 한 블로그 글에는 비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글이 있었다. 사실 필자는 그 글을 읽고 불쾌했다.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다. 부정적인 의도로 언급하였으므로 굳이 링크를 걸지는 않겠다.
몇 년 전 필자는 <아가씨를 부탁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어느 한 장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2] 왜 했는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키스를 한 것도 알겠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겉옷을 벗긴 것도 알겠는데 왜 다음 화의 시작은 침대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두 남녀 주인공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키스, 포옹 등이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사랑이 성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는 필자에게 "그건 이해하는 게 아냐. 당연히 이루어지는 거지."라고 하였지만 그것마저 필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필자는 먼저 언급한 블로그 글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일단 이 영상을 보십시오. 당신은 이 영상에서 그 두 사람이 왜 성관계를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도 성애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이런 게 있는 줄 아십시오." [3]
성애자나 비성애자나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지 비성애자는 많은 성애자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에 성애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성적 매력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성애자가 어떤 사람의 성적 매력이 어떤 부분인지 짚을 수 있는 것은 학습의 결과이다. 그들이 직접 성적 매력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점을 감안하여 "성적 매력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표현하였다.) 필자가 중학교 때 미취학 아동들이 친구에게 뽀뽀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랑 아주 흡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4월 4일 토요일
[사설]본 블로그에서 비성애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
"Asexuality"가 처음 제시된 언어는 영어이다. 영어에서 접두사 a-는 우리말에서 不, 無, 非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참고) 따라서 "무성애"란 단어 자체는 원어 asexuality를 잘 번역한 단어이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비성애"를 "무성애"보다 선호하므로 본 블로그에서는 "비성애"를 더 많이 사용한다. 사실 이유는 별 거 없으나 이것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단 Asexuality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이븐(AVEN, The 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에서는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참고) 여기서 말하는 성적 매력은 어떤 대상(실존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에 성적인 것이 결합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정리하면 비성애는 성관계(Sexual Intercourse)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을 말한다.
위 정의, 그러니까 필자가 다시 정리한 비성애의 정의(성관계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에서 핵심은 부족하다거나 결핍되었다거나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사랑이 성애 한 가지로만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애(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 모성애 내지는 부성애, 효(부모를 향한 자녀의 사랑) 등은 성애가 아니고 가족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같은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서 성애가 아니라고 해서, 다시 말해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없다"는 형용사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지만 "사랑이 없다"고 할 때 받는 어감은 썩 좋지 않다. 결국 부정적인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꼭 "부족하다"는 단어랑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물론 "부족"이란 단어는 비성애를 설명할 때 유효한 단어이다. (참고) 하지만 처음 비성애(무성애)를 접할 때 "없다"거나 "부족하다"고 한다면 받는 느낌이 부정적일 수 있고 비성애(무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많은 성애자들이 비성애에 대해서 알수록 비성애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필자는 비성애자임을 밝혔을 때 성인인 척 한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또 많은 경우 소위 중2병이나 허세를 부린다고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있어 보인다고 비성애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질 수도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오해를 더 키우고 싶지 않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 이유로 "무성애"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필자는 "무성애"란 단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주장하는 "아니다"는 표현은 과연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대답하면 아니다. "아니다"는 "다름" 혹은 "차이"를 의미로 내포할 수 있다. (참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차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그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아니하다; 아니다 + 하다)"고 하면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고 "싫어한다"는 느낌까지 함께 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경우에 "나는 네가 아니"라는 명제는 자명하다.
요약하면 어감 때문에 필자는 차라리 "비성애"란 표현을 "무성애" 대신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본 블로그에서는 그러한 판단을 따르고 있다.
일단 Asexuality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이븐(AVEN, The 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에서는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참고) 여기서 말하는 성적 매력은 어떤 대상(실존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에 성적인 것이 결합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정리하면 비성애는 성관계(Sexual Intercourse)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을 말한다.
위 정의, 그러니까 필자가 다시 정리한 비성애의 정의(성관계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에서 핵심은 부족하다거나 결핍되었다거나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사랑이 성애 한 가지로만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애(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 모성애 내지는 부성애, 효(부모를 향한 자녀의 사랑) 등은 성애가 아니고 가족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같은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서 성애가 아니라고 해서, 다시 말해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없다"는 형용사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지만 "사랑이 없다"고 할 때 받는 어감은 썩 좋지 않다. 결국 부정적인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꼭 "부족하다"는 단어랑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물론 "부족"이란 단어는 비성애를 설명할 때 유효한 단어이다. (참고) 하지만 처음 비성애(무성애)를 접할 때 "없다"거나 "부족하다"고 한다면 받는 느낌이 부정적일 수 있고 비성애(무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많은 성애자들이 비성애에 대해서 알수록 비성애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필자는 비성애자임을 밝혔을 때 성인인 척 한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또 많은 경우 소위 중2병이나 허세를 부린다고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있어 보인다고 비성애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질 수도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오해를 더 키우고 싶지 않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 이유로 "무성애"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필자는 "무성애"란 단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주장하는 "아니다"는 표현은 과연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대답하면 아니다. "아니다"는 "다름" 혹은 "차이"를 의미로 내포할 수 있다. (참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차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그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아니하다; 아니다 + 하다)"고 하면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고 "싫어한다"는 느낌까지 함께 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경우에 "나는 네가 아니"라는 명제는 자명하다.
요약하면 어감 때문에 필자는 차라리 "비성애"란 표현을 "무성애" 대신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본 블로그에서는 그러한 판단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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