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기사 첫 번째

필자는 보통 한국어 웹에서는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검색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검색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네이버에서 "무성애"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다. 가장 최근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는 경향신문의 기사였다.[1]

기사를 읽은 감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불쾌"였다.

기사를 쓴 기자가 직접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비성애를 제4의 성이라 했다. 우선 비성애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가 아닌데 제4의 성이라 하니 매우 불쾌했다. 아니 이 점에 대해서라면 다른 성 소수자들도 불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목을 붙여야 했나 싶었다.

기사는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씨가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성애가 알려졌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잠시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허지웅씨 덕분에 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애자(allosexual)에게 비성애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허지웅씨가 사용한 단어는 "무성욕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비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무성욕"이란 표현 자체는 비성애에 대해 이해할 때 방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단어를 비성애와 동일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비슷한 오해가 많음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 블로그 포스팅은 성애와 성욕을 동일시하였다. [2] 이런 블로그는 차라리 유성애자 입장에서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확실함이 빤히 보여 괜찮다. 하지만 의외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언론이 그런 오해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반영하여 작성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3]

마지막으로 기사는 비성애가 치료되어야 하는 병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하필이면 "정신분석적 갈등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현재 정신분석적 문제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4] DSM-5에서 언급하는 성욕 관련 사항들과 비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점은 다시 성욕(sexual desire)과 성애가 다르다는 사실로 돌아간다. 필자는 기사를 읽으며 두 개념을 혼동하여 비성애를 무성욕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자면 필자가 위에 링크를 건 기사는 성욕과 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무성욕"과 "무성애"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고[5] 쓴 별 도움 안 되는 기사이다.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무관하다.

우선 이 글에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정보가 포함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을 선정성을 의도로 작성하지는 않았음 또한 함께 밝힌다.

이 글은 퀘스처너리를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필자는 아직 다른 성 소수자(queer: non-heterosexual,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어떻게 확립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확립할 때를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원하는 경우 필자가 이미 올라온 글 중 비성애에 대한 글[1]과 성적 매력[2]에 대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3]

먼저 참고하라고 권한 글에 의하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비성애라 한다. 여기서 성적 매력이란 어떤 사람[4]과 성적인 접촉을 하여 성생활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5] 본 글에서 필자는 이 상기시킨 정의를 비성애에 대하여 많이 하는 오해와 연결하려 한다.

비성애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전혀 상관이 없다.

비성애와 성행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오해가 존재한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자위를 하는 사람이 비성애자일 수 없다.
많은 비성애자들이 커밍 아웃(coming out) 할 때[6] 위와 같은 오해에 부딛히곤 한다. 심지어 아직 성적 지향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들[7]마저 이런 오해를 하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필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반응하고 싶다.

위 오해는 비성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위로 올라가 어떤 사람을 비성애자라고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기를 바란다. 아마도 성행위와 관련된 단어[8]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 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자에게도 조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그렇다는 것 자체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사설]왜?

본 글은 15세 미만에게 대체로 권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므로 15세 미만이 읽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개인적으로 19세 미만의 접근을 막고는 싶지만 사실 그 정도로 선정적인 이야기를 할 예정은 아니므로 참도록 하겠다. 또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 없이 약간 불쾌할 수 있는 내용이 섞여 있음을 미리 밝힌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은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설명이 모든 비성애자들에게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someone who does not experience sexual attraction"[1]이란 비성애자의 정의를 가장 간단히 번역한 것이다.

저번에 필자가 본 한 블로그 글에는 비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글이 있었다. 사실 필자는 그 글을 읽고 불쾌했다.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다. 부정적인 의도로 언급하였으므로 굳이 링크를 걸지는 않겠다.

몇 년 전 필자는 <아가씨를 부탁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어느 한 장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2] 왜 했는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키스를 한 것도 알겠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겉옷을 벗긴 것도 알겠는데 왜 다음 화의 시작은 침대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두 남녀 주인공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키스, 포옹 등이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사랑이 성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성애자(유성애자; allosexual)는 필자에게 "그건 이해하는 게 아냐. 당연히 이루어지는 거지."라고 하였지만 그것마저 필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필자는 먼저 언급한 블로그 글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일단 이 영상을 보십시오. 당신은 이 영상에서 그 두 사람이 왜 성관계를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도 성애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이런 게 있는 줄 아십시오." [3]

성애자나 비성애자나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지 비성애자는 많은 성애자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에 성애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성적 매력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성애자가 어떤 사람의 성적 매력이 어떤 부분인지 짚을 수 있는 것은 학습의 결과이다. 그들이 직접 성적 매력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점을 감안하여 "성적 매력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표현하였다.) 필자가 중학교 때 미취학 아동들이 친구에게 뽀뽀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랑 아주 흡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4월 4일 토요일

[사설]본 블로그에서 비성애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

"Asexuality"가 처음 제시된 언어는 영어이다. 영어에서 접두사 a-는 우리말에서 不, 無, 非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참고) 따라서 "무성애"란 단어 자체는 원어 asexuality를 잘 번역한 단어이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비성애"를 "무성애"보다 선호하므로 본 블로그에서는 "비성애"를 더 많이 사용한다. 사실 이유는 별 거 없으나 이것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단 Asexuality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이븐(AVEN, The 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에서는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참고) 여기서 말하는 성적 매력은 어떤 대상(실존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에 성적인 것이 결합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정리하면 비성애는 성관계(Sexual Intercourse)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을 말한다.

위 정의, 그러니까 필자가 다시 정리한 비성애의 정의(성관계와 사랑이 철저히 분리된 것 혹은 양자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에서 핵심은 부족하다거나 결핍되었다거나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사랑이 성애 한 가지로만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애(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 모성애 내지는 부성애, 효(부모를 향한 자녀의 사랑) 등은 성애가 아니고 가족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같은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서 성애가 아니라고 해서, 다시 말해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없다"는 형용사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지만 "사랑이 없다"고 할 때 받는 어감은 썩 좋지 않다. 결국 부정적인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꼭 "부족하다"는 단어랑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물론 "부족"이란 단어는 비성애를 설명할 때 유효한 단어이다. (참고) 하지만 처음 비성애(무성애)를 접할 때 "없다"거나 "부족하다"고 한다면 받는 느낌이 부정적일 수 있고 비성애(무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많은 성애자들이 비성애에 대해서 알수록 비성애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필자는 비성애자임을 밝혔을 때 성인인 척 한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또 많은 경우 소위 중2병이나 허세를 부린다고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있어 보인다고 비성애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질 수도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오해를 더 키우고 싶지 않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 이유로 "무성애"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필자는 "무성애"란 단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주장하는 "아니다"는 표현은 과연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대답하면 아니다. "아니다"는 "다름" 혹은 "차이"를 의미로 내포할 수 있다. (참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차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그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아니하다; 아니다 + 하다)"고 하면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고 "싫어한다"는 느낌까지 함께 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경우에 "나는 네가 아니"라는 명제는 자명하다.

요약하면 어감 때문에 필자는 차라리 "비성애"란 표현을 "무성애" 대신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본 블로그에서는 그러한 판단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