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의 질 저하로 인해 포스팅을 중단합니다.
더 나은 내용으로 다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Asexuality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다룹니다. 웬만해선 문제 삼지 않겠지만 이왕 글을 퍼갈 때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성 소수자와 커밍아웃
※ 본 글은 성 소수자 집단 전체를 아우르려는 의도로 작성하였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커밍아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말하는 커밍아웃은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하는 사람)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나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는 벽장 속에서 나온다(come out of the closet)는 표현에서 왔다. 현재도 벽장 속에 있다고 하면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숨기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볼 때 커밍아웃은 하는 사람도, 그 대상도, 주변 사람도 긴장을 하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여전히 커밍아웃이 무서운 사건이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는 것도 있고 나중에 아웃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한 성 소수자는 커밍아웃을 할 때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한 유튜브 동영상에서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커밍아웃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많고 그 사람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커밍아웃한 대상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웃팅으로 인해 비슷한 사건을 겪을 수 있다.
아웃팅은 일부러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아, 걔 동성애자래."하는 말이나, "얘가 동성애자야."하는 말은 당연하게 아웃팅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말을 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는 자신이 아웃팅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혹시 여기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이 글을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말을 하고 싶다. 절대로 다른 사람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마라. 당신은 그저 신기해서 하는 말일지 몰라도 그 말이 그 성 소수자에게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외에도 커밍아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참고 문헌으로 대체한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커밍아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말하는 커밍아웃은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하는 사람)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나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는 벽장 속에서 나온다(come out of the closet)는 표현에서 왔다. 현재도 벽장 속에 있다고 하면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숨기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볼 때 커밍아웃은 하는 사람도, 그 대상도, 주변 사람도 긴장을 하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여전히 커밍아웃이 무서운 사건이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는 것도 있고 나중에 아웃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한 성 소수자는 커밍아웃을 할 때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한 유튜브 동영상에서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커밍아웃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많고 그 사람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커밍아웃한 대상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웃팅으로 인해 비슷한 사건을 겪을 수 있다.
아웃팅은 일부러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아, 걔 동성애자래."하는 말이나, "얘가 동성애자야."하는 말은 당연하게 아웃팅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말을 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는 자신이 아웃팅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혹시 여기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이 글을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말을 하고 싶다. 절대로 다른 사람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마라. 당신은 그저 신기해서 하는 말일지 몰라도 그 말이 그 성 소수자에게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외에도 커밍아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참고 문헌으로 대체한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차세기연)의 웹진 ≪물꼬기≫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라고 링크를 붙인다.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1부 http://equalchrist.blog.me/220228566358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2부 http://equalchrist.blog.me/220311519484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1부 http://equalchrist.blog.me/220228566358
차별없는 성경:신약에서 말하는 동성애 2부 http://equalchrist.blog.me/220311519484
2015년 5월 9일 토요일
[사설]비성애(무성애)와 섹스리스
※주의: 본 글은 필자 개인만의 관점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이 칼럼을 읽은 다른 비성애자의 관점은 소개하지 않도록 하겠다. (필자는 어떤 무성애자든 소개할 칼럼을 보고 불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칼럼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혹시 모르니 주소도 직접 붙인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4823
우선 이 글에서만큼은 비성애라는 단어 대신 무성애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은 칼럼에 반박하기 위해 쓰는 글임 또한 밝힌다.
"이젠"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앞으로 변할 가능성을 포함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려져 있다시피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부하다시피) 동성애는 고칠 수 없다. 실제로 성적 지향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이질적인 경우이고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성애자들은 무성애에 대해 오해할만한 표현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현재 무성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성히 많은 오해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개념이다. 그래서 한 무성애자의 말이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걸 국가관의 개념에 대입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입해보자면 외국인을 대할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신경쓰며 조심하는 것과 흡사하다.
필자는 소개한 칼럼이 성애규범적(sexual-normative) 관점에서 쓰인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이 칼럼을 읽은 다른 비성애자의 관점은 소개하지 않도록 하겠다. (필자는 어떤 무성애자든 소개할 칼럼을 보고 불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칼럼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혹시 모르니 주소도 직접 붙인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4823
우선 이 글에서만큼은 비성애라는 단어 대신 무성애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은 칼럼에 반박하기 위해 쓰는 글임 또한 밝힌다.
1. 무성애는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필자가 이전에 쓴 글을 참고하면 무성애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성적 끌림을 감정과 연결된 성욕으로 인식하고는 있으나 이것 또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페티시스트(fetishist)도 무성애자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극단화하긴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성적 끌림이라는 것이다.2. 어떤 사람이 성욕저하증이라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DSM-V도 읽어 보았으나 그럼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논하기에 필자는 아직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의사들끼리 하기 바란다.3. 내담자 J씨는 일반적인 무성애자의 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무성애자는 자신에 대해 "이젠"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굉장히 꺼린다. 첫째, 무성애라는 것을 고칠 수 있음을 시사할 수 있는 표현이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둘째, 대부분의 경우 성적 지향은 변동적이지 않다."이젠"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앞으로 변할 가능성을 포함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려져 있다시피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부하다시피) 동성애는 고칠 수 없다. 실제로 성적 지향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이질적인 경우이고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성애자들은 무성애에 대해 오해할만한 표현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현재 무성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성히 많은 오해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개념이다. 그래서 한 무성애자의 말이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걸 국가관의 개념에 대입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입해보자면 외국인을 대할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신경쓰며 조심하는 것과 흡사하다.
4. 내담자 J씨만의 사례를 가지고 무성애를 이해하기에는 무성애가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다.
실제로 내담자 J씨가 무성애자라 할지라도 세상에는 무성애자가 아주 많고 무성애라는 것이 정말 유효한 개념인지에 대한 논의도 학술적으로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유효한 개념이라고 결론일 날 것 같다.) 그러한 무성애를 한 사람의 경우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필자의 글도 논리적 오류로 점철되어 있기는 하다.)5. 1983년의 연구에서 무성애자에 대해 한 조사는 정말 유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재도 무성애라는 개념을 알지 못해 자신을 무성애자로 정체화하지 못하는 무성애자가 다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성애라는 것이 (다른 문제를 동반했든 않았든) 지배적인 문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해 무성애자들의 단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연구한 것이 과연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심지어 무성애라는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게 1980년도이다.)6.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서 성관계는 중요한 요소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많은 연구에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업로드할 글에서 포함하도록 하겠다.) 성적 욕구(sexual desire)와 애정은 별개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성관계가 과연 깊은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7. 무성애자라고 해서 다 성기능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은 다시 무성애가 무엇인지로 회귀한다. 무성애는 감정적인 문제에 가까운 것이지 신체적인 문제로 인한 것은 아니다.필자는 소개한 칼럼이 성애규범적(sexual-normative) 관점에서 쓰인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유)성애자(allosexual)의 관점
어떤 블로그 포스트를 읽었다. 필자가 읽은 후 본 블로그에 방문하게 되는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어 링크를 붙인다. 필자가 들은 경험담은 아웃팅 문제 때문에 함부로 밝힐 수 없음을 밝힌다.
http://latherydeath.blog.me/220245007199
위 블로그 포스팅에서 언급한 대로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반응은 양극성을 지니는 면이 없잖아 있다.
1. 부러워한다.
딱히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다. 어차피 이 점에 대해서는 딱히 기분 나빠할 거리가 없다. 그저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이상한 방향으로 이해한다.[1]
독신주의자인 줄 아는 경우는 그나마 양호하다. 문제는 성폭력의 피해자인 줄 알거나 환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성애 혐오증(무성애 혐오증; Aphobia)[2]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짧은 글이지만 한 블로그 포스트를 소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이만 줄이겠다.
http://latherydeath.blog.me/220245007199
위 블로그 포스팅에서 언급한 대로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반응은 양극성을 지니는 면이 없잖아 있다.
1. 부러워한다.
딱히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다. 어차피 이 점에 대해서는 딱히 기분 나빠할 거리가 없다. 그저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이상한 방향으로 이해한다.[1]
독신주의자인 줄 아는 경우는 그나마 양호하다. 문제는 성폭력의 피해자인 줄 알거나 환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성애 혐오증(무성애 혐오증; Aphobia)[2]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짧은 글이지만 한 블로그 포스트를 소개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이만 줄이겠다.
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한 기사 첫 번째
필자는 보통 한국어 웹에서는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에 대해 검색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검색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네이버에서 "무성애"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다. 가장 최근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는 경향신문의 기사였다.[1]
기사를 읽은 감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불쾌"였다.
기사를 쓴 기자가 직접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비성애를 제4의 성이라 했다. 우선 비성애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가 아닌데 제4의 성이라 하니 매우 불쾌했다. 아니 이 점에 대해서라면 다른 성 소수자들도 불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목을 붙여야 했나 싶었다.
기사는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씨가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성애가 알려졌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잠시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허지웅씨 덕분에 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애자(allosexual)에게 비성애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허지웅씨가 사용한 단어는 "무성욕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비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무성욕"이란 표현 자체는 비성애에 대해 이해할 때 방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단어를 비성애와 동일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비슷한 오해가 많음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 블로그 포스팅은 성애와 성욕을 동일시하였다. [2] 이런 블로그는 차라리 유성애자 입장에서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확실함이 빤히 보여 괜찮다. 하지만 의외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언론이 그런 오해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반영하여 작성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3]
마지막으로 기사는 비성애가 치료되어야 하는 병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하필이면 "정신분석적 갈등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현재 정신분석적 문제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4] DSM-5에서 언급하는 성욕 관련 사항들과 비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점은 다시 성욕(sexual desire)과 성애가 다르다는 사실로 돌아간다. 필자는 기사를 읽으며 두 개념을 혼동하여 비성애를 무성욕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자면 필자가 위에 링크를 건 기사는 성욕과 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무성욕"과 "무성애"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고[5] 쓴 별 도움 안 되는 기사이다.
기사를 읽은 감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불쾌"였다.
기사를 쓴 기자가 직접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비성애를 제4의 성이라 했다. 우선 비성애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가 아닌데 제4의 성이라 하니 매우 불쾌했다. 아니 이 점에 대해서라면 다른 성 소수자들도 불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목을 붙여야 했나 싶었다.
기사는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씨가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성애가 알려졌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잠시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허지웅씨 덕분에 많은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애자(allosexual)에게 비성애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허지웅씨가 사용한 단어는 "무성욕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비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무성욕"이란 표현 자체는 비성애에 대해 이해할 때 방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단어를 비성애와 동일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비슷한 오해가 많음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 블로그 포스팅은 성애와 성욕을 동일시하였다. [2] 이런 블로그는 차라리 유성애자 입장에서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확실함이 빤히 보여 괜찮다. 하지만 의외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언론이 그런 오해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반영하여 작성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3]
마지막으로 기사는 비성애가 치료되어야 하는 병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하필이면 "정신분석적 갈등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현재 정신분석적 문제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4] DSM-5에서 언급하는 성욕 관련 사항들과 비성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이 점은 다시 성욕(sexual desire)과 성애가 다르다는 사실로 돌아간다. 필자는 기사를 읽으며 두 개념을 혼동하여 비성애를 무성욕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자면 필자가 위에 링크를 건 기사는 성욕과 성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무성욕"과 "무성애"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고[5] 쓴 별 도움 안 되는 기사이다.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무관하다.
우선 이 글에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정보가 포함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을 선정성을 의도로 작성하지는 않았음 또한 함께 밝힌다.
이 글은 퀘스처너리를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필자는 아직 다른 성 소수자(queer: non-heterosexual,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어떻게 확립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확립할 때를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원하는 경우 필자가 이미 올라온 글 중 비성애에 대한 글[1]과 성적 매력[2]에 대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3]
먼저 참고하라고 권한 글에 의하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비성애라 한다. 여기서 성적 매력이란 어떤 사람[4]과 성적인 접촉을 하여 성생활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5] 본 글에서 필자는 이 상기시킨 정의를 비성애에 대하여 많이 하는 오해와 연결하려 한다.
위 오해는 비성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위로 올라가 어떤 사람을 비성애자라고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기를 바란다. 아마도 성행위와 관련된 단어[8]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 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자에게도 조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그렇다는 것 자체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은 퀘스처너리를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필자는 아직 다른 성 소수자(queer: non-heterosexual,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가 자신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어떻게 확립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비성애(무성애; asexuality)를 확립할 때를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선 원하는 경우 필자가 이미 올라온 글 중 비성애에 대한 글[1]과 성적 매력[2]에 대한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3]
먼저 참고하라고 권한 글에 의하면 비성애자(무성애자; asexual)는 성적 매력(성적 끌림; sexual attraction)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비성애라 한다. 여기서 성적 매력이란 어떤 사람[4]과 성적인 접촉을 하여 성생활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5] 본 글에서 필자는 이 상기시킨 정의를 비성애에 대하여 많이 하는 오해와 연결하려 한다.
비성애는 성행위(sexual behavior)와 전혀 상관이 없다.
비성애와 성행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오해가 존재한다.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은 비성애자일 수 없다.
자위를 하는 사람이 비성애자일 수 없다.많은 비성애자들이 커밍 아웃(coming out) 할 때[6] 위와 같은 오해에 부딛히곤 한다. 심지어 아직 성적 지향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들[7]마저 이런 오해를 하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필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반응하고 싶다.
위 오해는 비성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위로 올라가 어떤 사람을 비성애자라고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기를 바란다. 아마도 성행위와 관련된 단어[8]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 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자에게도 조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그렇다는 것 자체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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